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니체 (문단 편집) == 개요 == >'''Gott ist tot.''' Gott bleibt tot. Und wir haben ihn getötet. Wie trosten wir uns, die Mörder aller Mörder?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 >즐거운 학문(1882) 中, 125p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의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의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니체가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 >―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제1장 中 [[19세기]]에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시인, 음악가, 문헌학자, 문화 비평가, 심리학자, 계보학자. 그가 주장한 주요 철학적 사상에는 [[신은 죽었다]][* 서양의 전통적인 최고 가치로서의 신이 부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시작은, 소크라테스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에 의해 육체적 삶을 도외시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그리스도교가 계승하며 더욱 고착화된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현실의 삶보다 내세의 삶(천국)을 더 강조하기에, 천국을 강조할수록 '현실에서의 삶'은 점점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신은 죽어야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힘에의 의지]][* 절대적 가치(신)가 사라진 세상에선, 스스로가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속에 살고 있으며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면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스스로가 만든 가치가 상대가 만든 가치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기 위한 노력과 의지가 곧 '힘에의 의지'가 된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방의 가치를 짓밟고자 함은 아니다. 상대방과의 경쟁을 통해 나의 가치가 세련되게 다듬어지므로, 상대방의 가치는 나의 가치 형성에 필수적이며 따라서 상대방의 가치 또한 소중해 할 줄 안다. 이런 경쟁을 통해 내 삶을 지배하는 가치를 내 스스로 만들어 내고, 내 삶의 규칙들을 내 손으로 작성하는, 그런 사람이 위버멘쉬가 된다.], [[위버멘쉬]][* 초인/Übermensch(Overman), (보통)사람을 넘어서라. 니체는 개개인이 스스로의 가치와 욕망을 추구하는 '정신적 귀족'이 되기를 원했다. 니체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노예'라고 불렀는데, 노예는 자신의 욕구를 절제한다. 또한 노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권리(힘에의 의지)를 양보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러한 노예의 반대를 뜻하는 것이 '정신적 귀족'이다. 즉,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말한다.][* 니체는 위버멘쉬를 설명할 때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하는데, 어린아이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즐긴다. 이야말로 귀족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노예는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며(그게 약자라면 경쟁하기 위하여, 그게 강자라면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한다. 노예는 단지 남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지만(자신을 선하다고 보기 위해서 자신을 억압하는 주인을 악으로 두는 것), 귀족은 남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도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줄 안다.], [[영겁 회귀|영원 회귀]][* 스스로가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어떤 욕망의 대상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모든 욕망은 성취를 이루면 권태로워진다. 즉 가치 생성의 마지막 귀결은 권태라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삶이 허무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우리의 일상도 욕망추구와 마찬가지다. 결국 일상은 반복됨으로써 권태를 느끼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 반복된 일상(욕망추구)을 뒤집어서 생각하고자 한다. 반복은 일종의 원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원 '위'에서의 운동은 선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곳에 위치하든지 자신의 위치가 중심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즉,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금 현재의 순간순간이,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렵게 얘기하자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은 시간이 없는 세상과 동일하다. 이데아만 있는 세상이다. 즉, 신의 세상에서는 '시간'이 없다. 이는 인간의 세상에서도 잠시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을 극한으로 미분하면 순간이 되는데, 이 '순간' 역시 시간이 없는 영원이라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의 시공간론 참조) 그런데, 이 '순간'은 현재에 무한히 반복된다. 따라서 영원 회귀란, 무한히 반복되는 '순간'... 그것은 바로 지금 '현재'라는 것이다. (즉, 천국은 '현재'에 있다는 것.)], [[아모르 파티|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 파티(Amor fati/라틴어)를 말한다. 영원회귀에서 개인 삶의 모든 현재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몰락해 가고 있는 우리의 삶마저 우리의 중심이라고 외칠 수 있다. 즉 몰락해가는 우리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가 되며, 여기서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왔고 자신이 만들어갈 운명이 설혹 그 결과가 불합리하게 여겨지더라도, 자신이 만들어왔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그 불합리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운명을 사랑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등이 있다. 특유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대륙철학]],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대륙 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 니체사상이 나치에게 이용된 이후로 유럽에서는 금기시되다가 다시 발굴된 것은 [[하이데거]]에 의해서이다. 영미철학계 내에서도 적을 분석한다는 차원에서 니체 연구가 들어갔는데, 영미철학계는 사실 니체 사상이 나치가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알리는 철학적 작업들을 통해서 영미권에도 니체전문가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유럽권에서는 니체를 실존철학, 포스트모더니즘사상과 연관짓는 반면에, 영미권의 분석들은 대부분 니체를 정치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와 더불어 현대 인문학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 시대 지식인들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마르크스와 니체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진실되지 못하다는 말로, 니체가 당대에 끼친 지성사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발언이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OfKMrlGMfPkC&pg=PR27&dq=weber+nietzsche+marx+baumgarten&hl=ko&sa=X&ved=0ahUKEwjy5p6BiJLaAhXIVLwKHUqcDEkQ6AEIJjAA#v=onepage&q=weber%20nietzsche%20marx%20baumgarten&f=false|출처]]][* 앞뒤 문장을 더 적으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학자, 특히 철학자의 정직성을 측정하려면 마르크스와 니체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된다. 니체와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자신의 저술이 상당 부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저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정신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사실상 마르크스와 니체가 만든 세계다.Wilhelm Hennis, 2000. "The Trace of Nietzsche in the Work of Max Weber", Max Weber's Central Question. (Threshold Press). p.149. / Bryan Turner가 1999년에 쓴 Classical Sociology 85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특유의 공격적 비판으로 인해 오인되기도 하지만, 어떤 철학자보다 넓은 사상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이며 그의 저서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극단적일 정도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니체는 불신자가 신자가 되거나, 보수주의자가 혁명가가 되거나, 방법론적 학자가 몽상가가 되거나,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가 광신자가 되어왔다”고 말한다.] 그러한 까닭 중 하나는 니체 특유의 서술 방식이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압축적이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지며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이것은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 본인이 직접 언급하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니체는 아포리즘(일부 번역본에서는 잠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잠언은 한마디의 짧은 경구이며 아포리즘은 어느 정도의 부피를 지닌 긴 논의라는 점에서 서로 명확히 구별된다)으로 쓰인 자신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일단 그것을 온당하게 읽어내는 것만 해도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쓰고 있다. '아침놀' 서문에서는 대놓고 본인을 읽는 법을 배우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성격은 온화하고 유머를 좋아했으며 사교성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